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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발전사 - 8) 도전과 비상 - 위기 극복과 정보통신 혁명

N Crystal 2022. 11. 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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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도전과 비상 - 위기 극복과 정보통신 혁명


위기는 잘나갈 때 숨어서 다가오는 법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3저 호황’으로 경제는 순풍에 돛 단 듯이 잘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적 찬사와 OECD 가입으로 온 국민이 자부심에 가득 차 있던 1997년 한국경제는 뜻하지 않은 외환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12월 발생한 외환위기는 한국의 은행과 기업들이 해외에서 단기로 빌려 온 달러 자금이 한꺼번에 한국에서 빠져나가면서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된 사건입니다. 초유의 국가부도 위기 앞에서 온 국민이 뭉쳤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했고 기업과 금융, 정부 부문 개혁을 단행하는 등 모든 힘을 다해 구조조정에 나섰으며 수출을 늘려 위기를 빠른 시간 내에 극복했습니다. 위기 이후 단단해진 한국경제는 IT 와 디지털 경제 발전을 통해 제2의 도약을 하게 됩니다.

1) 외환위기의 극복

1997년 해외 금융기관들은 동아시아 금융시장이 불안해지자 그동안 한국에 빌려줬던 돈을 한꺼번에 빼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 같은 돈을 모두 되돌려 줄 만큼 외화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이나 기업이 은행돈을 갚지 못하면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처럼 국가도 돈을 갚지 못하면 부도가 납니다. 한마디로 국가 전체가 부도 위기에 몰린 것입니다. 도대체 1997년에 한국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한꺼번에 생긴다는 뜻인데, 당시 한국경제는 운이 나쁘게도 몇 가지 악재가 동시에 겹쳤습니다. 우선 1996년 반도체 수출단가가 급격히 하락한 것이 불운이었습니다. 한국은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이 가장 높은데 반도체는 시장 수급에 따라 가격이 크게 변하고 경기에 민감합니다. 하필 1996년 국제 시장에서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자 한국의 경상수지가 큰 폭의 적자를 냈습니다. 즉 외국에서 달러를 되돌려 달라고 할 경우 내줄 수 있는 외환보유고가 크게 줄어든 것입니다. 둘째, 국내 은행들이 무분별하게 해외에서 단기 자금을 많이 빌려왔습니다. 돈을 빌릴 때 내야 하는 이자는 빨리 갚아야 하는 단기보다는 천천히 갚아도 되는 장기 금리가 더 높고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용이 나쁠수록 더 높습니다. 그런데 당시까지 한국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신용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신용이 좋은 한국 금융기관이 단기 금리를 낮은 이자로 빌려서 신용이 좋지 않은 다른 국가나 국내 기업에 장기로 빌려주었습니다. 금융 중개만 하고 있어도 이자 차익이 남기 때문에 국내 은행들이 이 같은 위험한 돈거래 규모를 키운 것입니다. 금융을 감독하는 관점에서 보면 기간미스매치(단기로 빌려서 장기로 대출해 주는 것) 위험과 신용 위험 두 가지 위험에 국내 금융기관들이 노출된 것입니다. 셋째, 낮은 금리로 장기 달러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 국내 기업들은 빚에 의존하는 과거의 확장경영을 계속했습니다.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국내 기업들은 빚을 얻어 그 빚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수익을 올려 몸집을 키워 왔기 때문에 빚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빚을 얻어 시설을 키우고 확장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여 당시 제조업 부채비율이 평균 400% 안팎, 어떤 대기업은 1,000%가 넘는 빚을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자본금이 1억 원인데 10억 원의 빚을 얻어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기가 좋았을 때는 이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1996년부터 수출경기가 갑자기 나빠지면서 빚으로 몸집을 키운 부실기업들이 무더기로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1월 한보그룹이 쓰러지면서 한보의 빚을 떠안게 된 금융기관들이 일제히 다른 기업에 대한 대출을 중단했고 그 후유증으로 다른 대기업들이 매달 하나둘씩 부도를 내고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넷째, 1997년 중반 태국발 외환위기가 아시아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태국 경제가 어려워지자 미국 등 서구 선진국 금융 자본가들이 태국시장뿐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빌려준 돈을 일제히 빼 가기 시작했습니다. 외환위기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홍콩 등을 거쳐 한국까지 밀려왔습니다(이걸 외환위기의 ‘감염효과’라고 합니다). 이처럼 여러 악재가 한꺼번에 겹치자 외국 금융기관들은 한국 금융기관에 빌려준 단기 자금을 동시에 회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경상수지 적자 폭이 컸던 데다 단기로 빌린 돈을 장기로 기업이나 해외에 빌려줬기 때문에 갚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국가 전체가 부도 위기에 몰리게 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나 말레이시아 등은 국가부도 선언을 하고 돈을 갚지 않았지만, 한국은 형편이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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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 풍부하면 물물교환이라도 되지만 자원 빈국인 한국은 먼저 달러를 주고 원료를 수입해서 가공해 수출을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외화, 즉 달러가 반드시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협상을 통해 IMF로부터 달러 자금을 지원받아 국가부도는 피했지만, 바로 그 시점부터 IMF의 요구대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부실은행들과 빚을 못 갚는 대기업들의 문을 닫게 하면서 대규모 실업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나마 견딜 만한 공기업들과 일부 큰 기업들도 비용을 줄이기 위한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몰아치면서 ‘희망퇴직’,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인력을 줄이는 해고가 이어졌습니다. 실업자만 100만 명이 넘었고, 거리에는 노숙자가 급증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10% 안팎을 기록하던 높은 경제성장률은 –5% 아래로 곤두박질쳤습니다. ‘한강의 기적’은 이대로 끝이 나고 우리나라는 주저앉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IMF에서 돈을 빌린 많은 나라들이 부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난한 나라로 다시 추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달랐습니다. 대규모 실업 사태와 고금리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재기에 나섰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금 모으기 운동’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열렸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이유가 일본에게 진 빚 때문이라면, 국민들이 돈을 모아 대신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외환위기 때도 누군가가 “금을 모아 외국 빚을 갚자.”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돌, 결혼, 회갑 잔치 등에 금반지 등 금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는데, 대부분 장롱 서랍 속에 묵혀 있기 마련입니다. 금은 달러화, 유로화 등과 함께 국제적으로 외환보유고에 포함되는 자산인 만큼 이걸 팔아 나라 빚을 갚는 데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에 금을 모으기 위한 긴 줄이 이어졌고, 이 모습을 뉴스에서 지켜본 세계가 놀랐습니다. 심각한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폭동이 일어나거나 생필품 사재기를 하는 대신 나라 빚을 갚겠다고 국민들이 줄을 섰으니까요.


다행히 한국경제의 기초 체력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외국 금융기관들이 단기 외채를 장기로 연장해 주면서 달러 유동성 외환위기는 고비를 넘겼고 환율이 높아져 수출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습니다. 1달러에 800원 정도 하던 환율이 1달러에 1,900원대로 오르자 한국의 수출품 가격이 엄청나게 싸진 것입니다. 수출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달러가 쏟아져 들어와 부족한 외환보유고가 채워졌고, 한국경제도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결국 온 국민이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한 결과 2001년 IMF에 빌린 돈을 모두 갚았습니다. 당초 갚기로 약속했던 날짜보다 3년 빠른 시간이었습니다. IMF에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기간을 연장하거나 못 갚겠다고 손드는 나라들이 수두룩한데, 3년이나 일찍 갚았으니 세계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은 외환위기 와중에 기업, 금융, 재정, 노동 등 4대 부문 개혁을 스스로 추진했습니다. 기업들은 부채비율을 대폭 낮추어 몸집보다는 수익을 중시하는 경영으로 구조조정을 했고 금융기관들은 부실채권을 털어 내고 건전한 은행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정부는 비효율적인 정부 부문을 정리하고 많은 공기업들을 민영화하여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어 갔습니다. 각종 선진적 제도를 도입했고 시장 기능을 중시하되 시장이 부패하지 않도록 제도적, 법적 감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끝에 한국은 한 단계 더 높은 생산성국가, 선진국가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IMF는 한국의 변신에 대해 ‘위기를 기회로 바꾼 나라’라고 평가했습니다.

2) 새로운 성장의 동력 - 정보통신 혁명

코로나19 사태 이후 학생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습니다.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재택근무를 하고, 사람이 북적거리는 쇼핑몰에 가지 않은 채 스마트폰 앱으로 모든 물건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도 되는 ‘비대면’이어도 아무 불편함이 없는 이유는 한국의 온라인 시스템의 범위와 속도, 효율성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화 혁명’을 추진해 왔습니다. 1980년 후반부터 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망, 국방망 등 효율적인 국가운영을 위한 기간망(基幹網)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 중반부터는 “제조업 기반 경제에서는 우리가 일본이나 선진국에 뒤졌지만 정보화 시대는 반드시 앞서가겠다.”는 각오로 초고속 통신 인프라 구축을 위한 기초설계를 하고 ‘정보화 5개년 계획’을 세워 추진해 왔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무너진 제조업을 대신하기 위해 정부가 지식 산업과 정보 산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육성했습니다. 1998년 초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세계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과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초고속 인터넷에 집중 투자하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마침 1998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 통신이 점점 확산되던 때라 정부는 초고속 인터넷망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초고속 인터넷망에 투자하면서 인터넷 통신선이 전용선으로 바뀌었고, 전 국민이 자유롭고 저렴하게 인터넷에 접속해 이용하게 됐습니다. 또한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보급형 컴퓨터를 만들어 1가구 1컴퓨터 시대를 열었습니다. 정부는 또한 해방 직후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각 마을과 군대 내에서 한글교육을 한 것처럼 디지털 문맹을 해소하기 위해 컴퓨터와 인터넷 교육을 전국적으로 시행했습니다. 학생들은 물론 주부들, 대다수 노인 계층까지 모두 컴퓨터를 다룰 줄 알게 되었고 전산망은 도시와 농촌, 섬 지역까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처럼 초고속 인터넷망과 1가구 1컴퓨터 시대가 열리자 기업들은 새로운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른바 ‘벤처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기업은 자동차나 선박, 석유화학제품, 철강, 아파트, 도로 등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제조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망이 확산되자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기업인들이 새로운 시장에 도전했고, 검색·커뮤니티·게임·쇼핑몰 등 인터넷을 이용한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기업이 ‘네이버’, ‘엔씨소프트’, ‘카카오’ 등 입니다.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철강, 조선 등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주도한 산업들은 초기에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하고 에너지 의존형인데, 이와 같은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은 초기 투자금이 적어도 기발한 아이디어와 열정만으로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덩치 큰 제조업 위주로 구성돼 있던 우리 산업은 새로운 벤처기업들로 인해 산업 생태계가 다양해지고 건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창의적인 기업가들이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초고속 통신망은 또한 휴대전화와 스마트폰 시대를 앞당겼습니다. 인터넷과 초고속 통신망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 연구소나 큰 기업 전산실에만 있던 거대한 컴퓨터와 견줘도 성능이 뒤떨어지지 않는 개인용 컴퓨터를 개개인이 자기 집 책상에 두고 쓰는 시대가 왔고, 전 세계의 정보를 쉽게 얻는 것은 물론 사람들과 더 자주, 더 빠르게, 더 많이 소통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휴대전화와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통화를 하고 메시지나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집 바깥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집안 냉장고에 뭐가 부족한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안전하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사물인터넷(IoT) 이라고 합니다. 한국경제는 앞선 정보화 인프라와 국민적 디지털 역량을 결합하여 IoT뿐만 아니라, 정보들을 모아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내는 ‘빅데이터’, 공유 공간에 데이터를 저장하고 꺼내 쓰는 클라우드, 인공지능(AI), 로봇 등 4차 산업혁명에서도 앞서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올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전에는 기계가 발달하면서 기계가 사람이 하기에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대신했는데,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머리를 써야 하는 일도 상당 부분 대신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운전할 필요가 없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고, 인공지능 기능이 들어간 로봇은 단순 반복 업무에서 벗어나 생각을 해야 하는 조금 더 어려운 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미래 우리의 일자리에도 큰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 KDI, 한국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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