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날개 단 경제성장의 신화 ‘한강의 기적’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이 됐습니다. 서독에는 자본주의가, 동독에는 공산주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본주의를 택한 서독은 전후에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룩해 미국 다음으로 큰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됐고 자원이 거의 없었던 서독의 경제 발전을 두고 몇몇 사람들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라인강은 독일을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는 강입니다. 독일처럼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분단이 됐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려 냉전을 겪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남한과 북한입니다.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이던 남북은 1970년대부터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한은 1980년대 초반 잠깐 위기를 겪었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격차를 확실하게 벌렸습니다. 이를 국제적으로 알린 사건이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서울올림픽’입니다.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을 직접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 받던 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로 풍요로운 나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이를 독일 ‘라인강의 기적’에 빗대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1) 안정화, 자율화, 개방화 정책이 불러온 ‘3저 호황’
1970년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산업 체질을 바꾸었지만 1970년대 후반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중화학공업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대표적인 산업입니다. 중동 정세가 불안해져 석유값이 급등하자 석유를 전량 수입하던 우리나라는 제품 생산비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품 생산비가 오르면서 물가가 폭등하고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으며 중화학공업 관련 공장의 가동률이 뚝 떨어졌습니다. 수출이 막히면서 과잉 생산과 중복 투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미국이 금리를 20%까지 올렸는데, 자본을 대부분 미국에서 빌려 쓰던 우리나라 기업들의 이자 부담이 늘어나고 외채 부담도 커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이 저개발 개도국일 때는 관대했던 선진국들이 대한민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자 각종 수출 혜택을 대폭 줄이면서 국내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 주도, 공급 위주의 경제개발전략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한 정부는 1980년 초부터 시장 기능을 회복시키고 외국의 시장개방 압력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며 물가를 한 자릿수로 낮추기 위한 ‘안정화, 자율화, 개방화’의 3대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첫째, 물가 안정을 위해 나라 살림살이를 졸라매 불필요한 지출을 줄였습니다. 해마다 크게 오르던 임금을 인상하지 않았고, 가을에 농민들에게서 정부가 쌀을 사들이는 가격인 ‘추곡수매가’를 동결했으며 남북대치 상황에서도 국방비 증가를 억제했습니다. 둘째, 중화학공업이나 수출 기업에 대한 세금 지원이나 정책자금 지원을 줄이고 금융시장을 자율화하여 민간기업이 금융시장을 통해 주도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도록 했습니다. 셋째, 선진국의 개방 압력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수입예고제를 시행하여 수입이 본격화되기 전 기업들이 품질경쟁력을 높이도록 자극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은 1985년 무렵 당시 국제적으로 ‘저환율, 저금리, 저유가’ 등 이른바 3저 호황 상황이 도래하면서 결실을 거두어 한국의 중화학공업 수출이 날개를 달게 된 것입니다. 일본과 독일이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으로 한창 잘나가던 때입니다. 특히 일본은 미국 시장에 엄청나게 수출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요타·혼다와 같은 자동차, 소니·파나소닉과 같은 전자제품 등이 미국 시장을 휩쓸다시피 했습니다. 기술력이 뛰어난 데다 일본 엔화의 환율을 미국 달러화보다 낮게 유지해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무역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국 정부는 일본과 독일, 영국, 프랑스 정부를 미국 뉴욕으로 불러 당시 독일 화폐인 ‘마르크’화와 일본 화폐인 ‘엔’화의 환율을 조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엔화의 가치가 올라가게 됐습니다(이때 합의가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맺어졌다고 하여 ‘플라자 합의’라고 합니다). 당시 엔화는 1달러에 200엔이 넘었는데, 플라자 합의 이후 100엔 전후로 엔화 강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과거에는 미국에 5달러에 팔았던 상품을 10달러에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물건 값이 두 배나 비싸졌으니 일본의 상품 수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가장 큰 혜택을 본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력과 생산력이 높아져 일본 제품과 해외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던 참이었는데, 일본 제품의 가격이 두 배로 오르자 해외 구매자들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한국 제품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 수출품은 원래도 일본 제품에 비해 가격이 싼 데다 엔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원화 가치가 낮아 그 혜택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마침 세계 금융시장에서 금리 인하 현상(저금리)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개발 국가들은 경제개발 초기에 투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돈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빌려왔는데, 1970년대 말 석유파동으로 미국이 금리를 급격하게 올리자 빌린 돈에 대한 이자 부담이 엄청났습니다. 그때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의 국가가 이자를 갚지 못해 국가 부도의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 초반 위기를 맞았는데, 어렵게 물가를 안정시키고 소비거품을 빼서 위기를 극복했다는 점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1984년부터 국제 금융시장의 금리가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진국에서 빌려온 돈에 대한 이자 부담이 줄어들자 기업들은 돈을 빌려 더 과감하게 기술개발을 하고 생산·투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국제 석유 값 하락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저유가). 1980년대 들어 석유 값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석유를 100% 수입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공장의 제품 생산 원가가 내려가 수출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고, 마침 일본은 환율 문제로 수출이 휘청거리자 한국의 수출 기업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전적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했습니다. 이렇게 1980년대 중반 이후의 ‘낮은 환율’, ‘낮은 금리’, ‘낮은 석유 값’ 세 가지가 배경이 돼 우리나라 경제는 기록적인 호황을 누렸습니다. 경제성장률이 높아져 1986년 11.2%, 1987년 12.5%, 1988년 11.9%라는 기록적인 성장률을 기록했고 국제수지도 건국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흑자로 바뀌게 됐습니다. 늘 달러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던 한국이 갑자기 달러가 넘쳐나 문제가 될 것을 걱정해 해외여행을 자유화했습니다. 국민들의 70% 이상이 ‘나는 중산층’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가계 수입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소득이 늘어나자 소비도 활발해졌습니다. TV·냉장고·세탁기 등 전자제품이 잘 팔렸고, 자동차를 구입하는 집들도 늘어났습니다. 자가용 자동차를 갖게 된 중산층 가계가 늘어나면서 ‘마이카(My Car)’ 시대가 열렸고 예상치 못하게 늘어난 자동차 때문에 도로는 항상 꽉 막혀 ‘교통체증’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나오게 됩니다.
2) 세상을 놀라게 한 서울올림픽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올림픽 개최는 일정한 경제 규모가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선진국들 위주로 돌아가면서 열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때문에 과연 한국에서 올림픽 개최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은 과거에 한 차례 아시안게임 개최를 포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1970년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지하철 공사,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투자 등에 막대한 돈을 쓰고 있어 여유가 없었습니다. 남북 대치 상황도 심각해 북한에서 김신조 일당을 남한에 침투시켜 청와대를 급습하려다 들켜 진압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국제적 망신을 감수하고 아시안게임 개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회는 태국 방콕에서 대신 열렸습니다. 한국은 포기했던 아시안게임에 다시 도전하여 16년 뒤인 1986년에 개최하였습니다. 그래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해외 일각에서는 이런 의구심이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미지 속에 한국은 아직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였고 남북 대치 상황 역시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1987년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어서 외국 TV뉴스와 신문에 한국 소식은 시위 관련 뉴스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올림픽 자체의 상황도 좋지 않았습니다. 소련(러시아)에서 열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반발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불참했고, 그 다음 미국에서 열린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불참해 두 번 모두 반쪽짜리 올림픽이 열렸
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작은 분단국가 한 쪽에서 열리는 올림픽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서울올림픽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선 1987년 헌법 개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직선제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후 총력을 다해 올림픽 준비를 했습니다. 다행히 국제적으로도 냉전 분위기가 누그러져 미국 등 서방 세계 선진국들은 물론, 소련과 동독 등 공산권 국가들도 대부분 참가했으며 오랜만에 전 세계인의 화합을 위한 스포츠 축제라는 올림픽 정신이 구현됐습니다. 올림픽위원회 회원국 167개국 중 160개국이 참가했습니다. 불참한 올림픽위원회 회원국은 쿠바, 알바니아 등 7개 나라 정도에 불과했습니다(이때 북한은 불참했습니다). 올림픽 출전을 위해 온 선수단은 물론 TV 중계로 올림픽을 시청하던 전 세계인들이 한국을 보고 놀랐습니다. 현대식으로 지은 초대형 경기장, 넓고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들, 도심에 건설된 고층 빌딩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서울 시내 곳곳을 잇는 지하철, 사람들의 친절한 미소. 모든 것들이 불과 30년 전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라고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특히 한국보다 북한과 친하던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나 한국과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남미 국가들에게 충격이 컸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자원의 양이나 시장의 크기, 기술 수준 등 무엇 하나 자기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는데, 어느덧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만큼 경제 강국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입니다. 올림픽을 한번 개최하면 서구 선진국들도 빚을 갚는 데 허리가 휠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서울올림픽은 큰 문제없이 성공적으로 치러졌습니다.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도 외교적으로 북방정책을 시작했고 당시 체제전환을 모색하던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남한과 국교를 수립해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 남미, 아프리카 여러나라들은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을 배우고자 찾아왔습니. 전 세계 사람들은 서울올림픽 이후 목격한 한국의 높은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출처 : KDI, 한국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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