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기의 경제 발전 전략 - 수출공업화
1950년대 말부터 한국에 큰 경제위기가 닥쳤습니다. 미국이 그동안 공짜로 물자를 대주던 무상원조를 대폭 줄이고 앞으로는 나중에 갚아야 하는 유상원조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전까지 무상으로 제공되던 해외 원조 자금으로 시멘트 공장, 비료 공장, 발전소 등을 조금씩 짓기 시작했는데 무상원조가 끊기게 되자 경제가 크게 후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해외에서 자본을 빌려와 투자하여 우리 스스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공장을 지을 자체 기술이나 역량이 없어 주요 공장시설을 해외에서 들여와야 했는데 모든 거래가 달러로 이루어졌던 만큼 달러 확보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초부터 달러 확보를 위한 수출에 온 힘을 쏟습니다. 초기에는 수출할 것이 마땅치 않아 농산물, 수산물, 광물, 나무 등 임산물을 주로 수출했습니다. 질 좋은 생선은 무조건 수출해야 했었기에 몰래 집에서 생선을 먹다가 경찰에게 잡혀가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농수산물은 유통기한이 짧고 해외 수송도 어려워 수출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가격도 싸서 달러 확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달러를 벌려면 공산품을 수출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한국경제는 수출공업화를 위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추진하게 됩니다.
1) 강력한 경제 리더십 - 경제기획원 신설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무상원조가 급감하자 수출 확대를 통한 자력생존과 경제 발전을 목표로 삼은 정부는 과감한 경제개혁 조치에 나섭니다. 우선 경제정책을 이끌어 갈 강력한 힘과 추진력을 가진 부처가 필요하다고 보고 1961년 경제기획원을 설립했습니다. 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는 기획 업무에 더해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예산 수립, 통계 작성이 합쳐진 아주 힘센 부처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경제기획원 장관은 국무총리에 이어 내각 서열 2위인 부총리로서 각 경제 부처를 진두 지휘했습니다. 경제기획원은 경제성장률 목표를 세우고 목표 달성 여부를 점검하는 일, 외국에서 빌려온 돈(차관)을 각 산업에 배분하는 일, 산업의 우선순위를 골라 집중 투자하는 일 등 경제정책과 관련된 모든 일을 책임지고 수행했습니다.
경제기획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일이었습니다. 초기 자본이 부족하고 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정부가 앞장서 산업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한국경제개발 전략에서 중요하게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계획 수립은 정부가, 시행은 민간기업’이 했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제를 설계하고 산업방향을 제시하지만 실제 투자와 생산은 어디까지나 시장을 중심으로 기업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정부가 직접 추진하고 공기업 위주로 경제 발전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다른 개발도상국들과의 가장 큰 차별적인 요소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경제기획원이 1960년대에 수립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전략은 필요한 돈을 해외 선진국에서 빌려 오는 차관 도입을 통한 수출공업화 정책과 부족한 자원을 경제성장 파급 효과가 높은 산업 분야에 먼저 투자하는 ‘선택과 집중’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섬유, 신발, 가발 같은 경공업 제품이었습니다. 경공업 제품은 별 기술이 필요 없고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여성들이 공장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았고 임금이 낮아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출 기업들을 키우는 전략은 철저한 ‘수출 보상책(인센티브)’과 ‘수입 보호’였습니다.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에는 외국에서 빌려 온 돈을 우선 빌려주거나, 수출해서 번 돈으로 원료를 우선 수입할 수 있게 하며, 수출 기업에는 각종 세금 혜택과 금융지원을 제공하는 등 총력 지원했습니다. 수출을 하는 기업들에 유리하게 환율을 책정했으며 수입을 막아 국내 기업을 보호했습니다.
이같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이 기업들의 창의적인 노력과 맞물려 1962년부터 본격화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후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2) 한국 경제개발의 특징 - 차관도입을 통한 수출공업화
2차 세계대전 후에 수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경제 발전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적극적인 수출보다는 수입대체전략을 채택했습니다. 해외에서 수입하던 의류, 신발 같은 경공업 제품은 물론, 라디오, TV, 자동차 등의 수입을 막고 국내에서 생산해 외화 유출을 막고 자급자족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기술력 수준이 높지 않아도 되는 의류나 신발 같은 경공업 제품은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강, 전자, 자동차, 선박, 항공기 같이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은 미국과 유럽 같은 선진국에 비해 자본과 기술력이 부족하다 보니 양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없었고, 자국 내에서 생산한 것들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핵심 부품 등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수입이 늘어났고 외화가 계속 빠져나가는 악순환이 계속됐습니다. 중남미의 상당수 국가들이 이와 같은 전략을 택했다가 성장 동력을 잃고 수차례 경제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럴듯하게 경제 발전 전략을 세우고도 이를 적극적으로 집행하는 데 실패하여 장기 침체된 국가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중남미 국가들과 달리 식량과 자원이 풍부하지 않아 수입대체 산업화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수출 주도 공업화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그런데 경제 개발 초기에는 돈이 없다 보니 해외에서 돈을 빌려 와 공장을 건설했기 때문에 “이러다가 외채(빚)의 늪에 빠져 나라경제가 망할 것”이라는 ‘외채 망국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외채의 이자는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일요일에도 쉬지 않는다.”는 걱정이 컸습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늘어나는 이자보다 더 빨리 움직였고,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 일하며 더 많이 생산하고 수출했습니다.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조금씩 수출량이 늘어나며 외화를 더 많이 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수출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정부는 수출 기업에 대출과 보조금, 산업보호 조치 등 각종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제철과 석유화학 등 일부 핵심 재료산업은 정부가 직접 투자하여 원료를 제공했습니다. 지역별로 공업단지를 만들어 관련 기술 연구소와 재료 공급업체, 최종 수출업체가 단지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생산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했고, 수출을 뒷받침 하기 위해 항만시설과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에 집중 투자했습니다.
3) 가발 수출부터 시작한 경공업 발전
수출공업화 초기에는 임금이 낮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공업을 집중 육성하고 수출했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습니다. 아주 초기에는 공장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생산 가능한 수출품은 여성 노동자들의 싼 노동력을 활용한 가발과 큰 쥐의 털을 이용한 털 옷 등에 불과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손재주가 좋고 부지런하여 한국산 가발이 미국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는데, 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67년 가발 산업을 수출 전략 산업으로 지정해 적극 육성했습니다. 1970년에는 수출액이 9,400만 달러로 우리나라에서 수출하는 품목 중 3위를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다음으로 화학 공장 등을 건설하면서 재료 공급이 늘어나자 섬유와 신발 등이 1960~1970년대의 효자 수출 상품으로 등장했습니다. 화학섬유가 수출의 선봉장에 섰고, 같은 화학섬유라도 좀 더 많이 수출하기 위해 품질을 개선하고 디자인을 다양화하였습니다. 지금 미술 분야에서 유명한 홍익대학교가 이때 디자인에 앞장섰던 대학입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미군에 정글용 군화를 납품했습니다. 한국의 신발 수출 기업이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전 세계 신발 브랜드들의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 주문이 쏟아졌습니다. 1980년대까지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 세계 유명 브랜드의 신발은 대부분 한국에서 생산됐습니다. 이 같은 경공업 생산 증가와 수출 호조가 지속되면서 1964년 1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이후 매년 수출 증가율이 40%를 넘어섰고 1967년에는 수출이 3억 5천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7년에서 1971년까지 59개 주요 개도국 가운데 경제성장률 1위, 수출신장률 1위, 고용증가율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5년 단위의 경제개발계획이 3차, 4차, 5차로 넘어 가면서 산업발전 단계와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방향이 설정된 것도 특징입니다. 1차에서 4차에 걸친 기간 동안 평균 경제성장률이 8.9%를 넘는 고도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세계 경제사에서 유례가 없는 장기 고도성장 기록입니다.
[출처 : KDI, 한국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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