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치, 경제, 국제, 시사/시사

한국경제 발전사 - 4) 개천에서 용이 나는 나라 - 교육과 인재육성

N Crystal 2022. 11. 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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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천에서 용이 나는 나라 - 교육과 인재육성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릴 적 불우한 환경을 딛고 어른이 돼서 성공한 사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발전 성과만큼 ‘개천에서 난 용’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 배경에는 자식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우리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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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굶더라도 자녀는 학교에 보낸다 - 교육 투자

조선시대는 양반과 상민이 엄격하게 구분되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제한적으로 보통 교육이 실시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인력으로 키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2세 이상 국민의 78%가 자신의 이름도 읽거나 쓰지 못 하는 ‘문맹’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해방 후 국민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됐습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는 ‘대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필수적이었고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거나 효율적으로 장사를 하려면 장부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전국 방방곡곡에 무료 강습소를 열어 한글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초등교육 의무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없는 나라 살림이었지만 전국 곳곳에 초등학교를 지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벽돌을 나르며 초등학교를 짓기도 하고 이럴 형편도 안 되는 지역에서는 천막을 쳐서라도 학교를 열었습니다. 학교를 지어도 선생님이 없으면 소용없기에 정부는 사범학교를 지어 교사를 적극 양성했습니다. 우수 인력을 교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교원에게는 당시 평균 임금보다 높은 월급을 주는 등 좋은 대우를 했습니다. 당시 실시됐던 농지개혁도 초등교육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적 신분제가 폐지되고 자영농으로 희망을 갖게 된 농민들은 자식들에게만은 절대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산골짜기에 살면서도 몇 십리 떨어진 읍내 학교에 자녀를 보냈고 공부를 잘하면 소를 팔고 땅을 팔아서라도 학비를 댔습니다. 이런 까닭에 한국에서는 상아탑으로 불리는 대학이 한때 ‘소뼈로 만든 탑’이라는 뜻의 ‘우골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높은 교육열로 인해 1950년대 말 초등학교 진학률은 96%에 달했습니다. 반면 문맹률은 4%로 떨어졌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고, 기본적인 교육을 받음으로써 민주 시민으로서의 기본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초등교육 의무화는 자연스럽게 상급학교 진학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에 더하여 1955년부터 아이들이 갑자기 많이 태어났고(‘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이 2부제 수업도 해야 했습니다(그 당시 좁은 교실에 학생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콩나물시루를 연상시킨다 하여 ‘콩나물 교실’이라는 신조어도 나왔습니다). 상급학교가 부족해지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시험을 봐서 갔기 때문에 입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 신문에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입시 준비에 시달리느라 나가서 뛰어놀지 못하고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하고 있어서 키가 크지 않는다.” 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정부는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을 만족시키기 위해 교육 기반을 대대적으로 확대해 나가게 됩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대학 진학률이 85%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너무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어렵고 힘든 저숙련 일자리를 꺼리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특정 학교 출신들끼리 뭉쳐 다니거나 개인의 창의성과 능력에 상관없이 출신 학교만 보고 판단을 하는 ‘학벌주의’라는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높은 교육열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 ‘과학자’, ‘군인’, ‘정치인’, ‘의사’, ‘간호사’, ‘기술자’, ‘판사’, ‘변호사’ 등의 꿈을 키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처럼 농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배우고 학력을 쌓아야 하는 전문직이 선망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경제 발전으로 높아진 고급 기술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고급 교육 강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충족되어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끄는 인적자산이 만들어졌고 한국의 주력 산업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바뀌게 됩니다.

[에피소드 3] 산업체 부설학교의 여성 노동자들
1950~1970년대 정부의 교육에 대한 과감하고 전폭적인 투자,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 배움에 대한 아이들의 갈망이 높은 진학률을 낳았지만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 또한 많았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1955년부터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1958년에는 신생아 수가 90만 명을 넘어섰고, 1960년에는 출산율이 무려 6.16명에 달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고 위생 상황이 좋지 않아 영아 사망률이 높았지만 1960년대 부터는 위생 환경이 좋아지고 병원도 많아지면서 영아 사망률이 낮아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한 집에 4~6명의 아이들이 자라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집은 자식들 전부를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보내기 힘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여자아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등교육이 의무여서 딸들을 초등학교까지는 어떻게든 보낸다 하더라도 중학교나 고등학교에는 진학시키지 못하는 부모들이 많았습니다. 딸들은 대개 집안일을 돕거나, 도시에 나가 가정부를 하거나,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어 집에 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대구, 구미, 부산, 서울 구로 공단 같은 데에는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공장에 취직한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방직산업이 수출 산업으로 떠오르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대거 채용했기 때문입니다. 여성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내놓은 대안은 공장 안에 학교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공장 안에 있다고 해서 이른바 ‘산업체 부설학교’입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수업 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학생이 절반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피곤해서 수업 시간에 졸지언정 학교를 빼먹지 않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일을 하지만, 성인이 된 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교를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힘든 여건 속에서 공부를 한 탓에 졸업식은 언제나 눈물바다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딴 뒤 일반 회사의 회계 경리 직원으로 채용이 되었고, 일부는 대학에 가서 교사가 되거나 간호사가 되는 등 각자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2) 기술이 나라를 살린다 - 공업교육과 기능교육

한국은 경제개발 초기에는 합판, 섬유, 신발 등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 수출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때는 높은 수준의 교육이 그리 필요치 않아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하였거나 간신히 졸업한 여성 인력들이 많이 일 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이 시작되고 산업 고도화가 진행되면서 산업 현장에는 더 많은 고급 기능 인력이 필요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중반부터 전국 곳곳에 있는 산업단지 지역에 공업고등학교를 세워 정부가 직접 기능 인력 양성에 나섰습니다. 공고 재학생에게 기숙사비를 받지 않고 장학금을 주는 방식으로 뛰어난 중학생들을 유치했습니다. 실제로 어느 공고는 등록금은 물론 숙식비 전액을 제공하는 국가장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입학자격을 중학교 석차 10% 이내로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공고에서 기술을 배우고 기능사 자격증을 따면 졸업 후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월급을 받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고, 자기 기술 활용 분야에서 군복무를 하며 경력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학에 가는 대신 기술을 배워 하루라도 빨리 취직해 돈을 벌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공업고등학교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때부터 산업현장의 주력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들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성 노동자로 바뀌게 됩니다. 기술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면서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습니다. 17~22세 청소년들이 모여 국제적으로 기술을 겨루는 ‘국제기능올림픽대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7년 스페인에서 열린 대회에 처음 참가해 양복과 제화 직종에서 금메달을 따는 성과를 냈습니다. 정부에서는 기능공들이 메달을 따면 훈장을 수여하고 대대적인 카퍼레이드 환영회를 열어 주는 등 기능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데도 공을 들였습니다.


1977년 스위스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28명의 기능인 선수가 나가 12명이 금메달을, 4명이 은메달을, 5명이 동메달을 땄습니다. 21명이 입상하며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입상 종목도 정밀기계와 첨단부품까지 다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기술 후진국 취급을 받던 한국의 위상이 갑자기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대한민국 팀은 승승장구를 거듭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후에 열린 여덟 번의 대회에서도 모두 우승해 국제기능올림픽대회 9연승이라는 기적적인 성과를 거뒀습니다. 1993년 아쉽게 준우승을 했지만 이후 다시 5연승을 했고, 그 후에도 5연승을 한 번 더 해 2015년까지 무려 총 19회 우승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4] 작업대 다리를 톱질한 제화공
배진효 씨는 서울에서 소문난 제화공이었습니다. 부산에 살던 배진효 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열여섯 살 때 무작정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지나가는 사람에게 “서울에서 제일 큰 양화점(洋靴店, 구두를 만드는곳)이 어딥니까?”라고 물어 찾아갔습니다. 배진효 씨는 “일을 달라.”고 사장에게 떼를 써서 수습공으로 취직했습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배진효 씨는 남들이 4~5년 걸리는 수습 기간을 1년 만에 떼고 제화공이 됐습니다. 구두 한 켤레를 만들려면 발 모양의 나무틀에 가죽 60여장을 일일이 손으로 붙이고 오려 꿰매야 했습니다. 한 켤레 만드는 데 10시간이 걸렸습니다. 배진효 씨는 여자 구두를 잘 만들었고 솜씨가 좋아 단골손님도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제기능올림픽’ 참가할 기능인을 선발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모집 분야가 도장(페인트칠), 동력 배선, 목공, 기계조립, 선반, 판금 등 공업 기술 분야뿐이었습니다. 배진효 씨는 좌절하지 않고 자비로 출전하기로 했습니다. 배진효 씨의 기술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양화점 사장은 출전 경비를 지원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해 대회가 시작되려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작업대가 서양인의 키에 맞춰져 있다 보니 배진효 씨에게는 높았던 것입니다. 배진효 씨는 톱을 꺼내 작업대의 다리 네 귀퉁이를 20센티미터씩 쓱쓱 잘라냈습니다. 그 뒤 대회 공통 과제를 남들보다 훨씬 빨리 끝냈습니다. 여유 있게 과제를 끝내고 쉬고 있는데 마침 대회 격려를 위해 방문한 스페인 공주의 눈에 띄어 그 자리에서 공주를 위한 실내용 슬리퍼도 뚝딱뚝딱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배진효 씨는 당당하게 금메달을 땄고, 공주의 슬리퍼 이야기가 알려지며 일약 스타가 됐습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기술 수준을 널리 알리고, 국민들이 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3) 조국을 위해 귀국하다 - 해외 첨단기술 인재 유치

산업이 발전하고 고도화될수록 고급 과학기술에 대한 필요성이 절박해졌습니다. 그런데 국내에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보유한 학자나 기술자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학에서 과학기술을 가르치던 일본인 교수들이 해방 후 모두 빠져 나가자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 인력도 부족했습니다. 일부 공과대학에서는 해당 분야를 가르칠 교수가 없어 학생들이 일본말이나 영어로 된 교재를 나누어 번역하고 서로를 가르치곤 했습니다. 1965년 국내 이공계 석박사 졸업생 수가 123명에 불과할 정도였습니다. 가르칠 교수가 없다 보니 많은 학생들이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유학할 돈이 없어 일단 미국에 노동자로 일하러 가서 돈을 벌어 다시 미국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많은 한국 학생들은 대우가 좋은 미국, 유럽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정착했습니다. 정부는 산업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해 해외에서 활동 중인 연구자들을 적극 유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유럽 등 해외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연구자들에게 고국에 돌아가 연구를 하자고 설득하면서 국내 대학교수보다 3배 많은 월급과 아파트 등을 제시했습니다. 대통령 월급이 7만 원이었는데, 많게는 9만 원까지 월급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들이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받는 월급은 정부가 제시한 월급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연구 환경에 있어서도 국내 연구시설은 걸음마 수준이어서 제대로 연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해외의 좋은 조건을 포기한 채 조국의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연구자들은 국내에 돌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이 국내에서 후학을 양성해 학문과 기술을 전수하면서 연구인력이 대폭 늘어나게 됐고,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
준의 과학기술 강국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에피소드 5] 존슨타워 대신 만들어진 기술연구소 KIST(키스트)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유학을 한 최형섭 박사는 금속공학 전문가입니다. 한국에 돌아온 최형섭 박사는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초대 소장에 임명됐습니다. 그에게 떨어진 첫 임무는 해외에 거주하는 뛰어난 동포 과학자들을 모셔오는 것이었습니다. 최형섭 박사는 미국과 유럽의 유명 대학과 연구소들을 찾아다니면서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해 달라.”라
고 동포 과학자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답을 얻기 힘들었습니다. 동포 과학자들로부터 “한국 대학은 겨울에 난로도 못 틀 정도로 열악하다고 들었는데, 실험 기자재는 있습니까?”, “월급을 얼마나 주실 수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최형섭박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연구보다 우리나라가 먹고 살 기술을 연구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당장 한국을 먹여 살릴 연구를 하는 게 목적입니다. 노벨상을 받는 게 당신의 목표라면 여기 남으십시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베트남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로 세워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전쟁)에 참전했는데, 우리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은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한국의 파병으로 한미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하자 방한했던 존슨 대통령이 “한국에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이 돈으로 존슨 대통령 방한 기념 타워나 다리를 건설하자는 의견 등이 나왔으나 “체계적으로 공업화를 하려면 기술연구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에 따라 KIST가 만들어졌습니다. 다리나 타워 대신 ‘과학의 상아탑’이 설립된 것입니다.


최형섭 박사의 끈질긴 설득에 많은 동포 과학자들이 감동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월급과 열악한 연구 환경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결심해 18명의 과학자가 귀국을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연구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대통령보다 많은 월급을 줬고, 밤 12시면 통행이 금지되고 불을 다 꺼야 하는 시절이었지만, 연구소만큼은 밤새도록 불을 켜고 연구를 할 수
있게 해 줬습니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불이 켜진 곳은 KIST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품질이 좋은 가발부터 컬러TV, 반도체, 원자력, 통신장비, 전차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면서 우리나라의 기술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국책 연구기관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는 기업들이 앞장서서 해외에서 활약 중인 과학자들을 불러오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들은 자체 연구소를 차리고 해외 유수의 대학과 기업 연구소에서 활동중인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초청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자동차, 대형선박, 통신장비를 만드는 나라가 됐습니다. 이제는 외국의 인재들이 한국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그들의 모국에서 탐내는 인재로 커가고 있습니다.

[출처 : KDI, 한국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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