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화학공업 육성 - 조선, 자동차, 기계, 전자 산업
1950년대 한국은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100달러도 안 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960년 미국의 한 언론은 “한국에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비관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50~60여년의 시간이 지난 현재 한국의 수출은 세계 10위권입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는 삼성전자, 2위는 SK하이닉스입니다. 두 기업이 세계 반도체 시장의 75%를 점하고 있습니다. LNG운반선, 석유시추선, 유조선 등 첨단기술의 값비싼 선박을 만드는 조선 분야에서 세계 상위 3개 업체는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입니다.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 세계 1위 업체는 삼성전자입니다. TV,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 생활가전 시장에도 한국 기업들이 품질 기준 세계 1, 2위를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고, 자동차, 배터리 등 대부분의 주요 완성품 산업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세계 10위권 안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한국경제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떤 요인 덕분에 이 같은 눈부신 경제 발전이 가능했을까요?
1) 중화학공업 육성의 긴급한 필요성
1960년대에 한국이 열심히 추진했던 경공업 수출 제품들은 기본적으로 가격이 싸고 수익성이 낮았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자원이 없어 원자재를 계속 수입해야 했기에 수출이 늘어날수록 수입도 함께 늘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1960년대 후반 들어 후발개도국들이 우리보다 더 싼 인건비로 경공업 수출에 뛰어들면서 한국의 수출 경쟁력이 하락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일부 TV나 라디오, 심지어 반도체까지 수출했지만 핵심 부품을 대부분 수입하여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단순 조립하는 데 그쳐 수익성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TV 한 대를 수출하여 버는 돈이 약 40달러였는데 핵심 부품이나 에너지원을 수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 36달러였습니다. 남은 4달러로 공장 운영비와 노동자 인건비, 수리비 등을 모두
해결했으니 수출해 봐야 별로 손에 남는 게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경공업이나 단순 조립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산업의 육성이 절실해졌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970년을 전후하여 북한의 대남 도발이 늘어나고 미국이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게 되자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위산업 육성의 필요성이 높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1973년에 나오게 된 것이 중화학공업 육성 선언입니다. 평화 시에는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 산업, 전시에는 즉각 방위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철강, 기계, 전자, 조선, 자동차 등 중화학공업 육성이 적극 추진된 것입니다. 포항제철(현재 포스코)을 세워 그 당시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제품 생산을 늘리고 자동차, 조선에 적극적으로 투자했으며, 전자 산업을 육성하여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70년대의 적극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은 1980년대 중반에 빛을 보게 됩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저환율, 저금리, 저유가 등 ‘3저 효과’가 발생하면서 한국의 중화학공업 수출이 날개를 달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경제적 약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한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부상했습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싱가포르, 홍콩, 대만, 한국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네 나라의 공통점은 저개발국가로 출발했지만 수출을 통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발전이 있기까지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1973년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했지만 한국에는 자동차, 조선, 전자 산업 등의 기초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자동차 산업의 발전 -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
우리나라는 1955년에 처음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삼 형제는 미군이 폐차한 군용차의 엔진과 변속기를 재활용해 ‘시발(始發)차’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철판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체는 드럼통을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들었습니다. 손으로 만든 ‘깡통차’이다 보니 대량생산이 불가능했습니다. 차를 만들어도 차를 움직일 석유가 없어서 차 한 대가 폐차되어야 다른 차 한 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후 현대적 의미의 자동차 공장이 하나둘씩 생겨났지만 이 역시 미국이나 일본 기업이 투자하고 이들이 자국에서 만든 자동차 부품을 그대로 가져다 조립하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로 결정한 정부는 더 이상 자동차 생산을 수입에 의존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1974년 자동차공업진흥 계획을 세워 자동차의 국산화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바로 그해 엔진을 국산화한 기아자동차의 ‘브리샤’와 독자 모델인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탄생했습니다. 포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모델이었습니다. 외국 자동차 회사에서 기술을 들여오고 디자인은 이탈리아 회사에 맡긴 것이지만, 외국 자동차 모델을 그대로 들여와 조립만 하다가 처음으로 우리 고유의 모델을 제작한 것입니다. 또한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한 국산 자동차입니다. 무엇보다 포니를 제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동차 독자 개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 회사에 파견된 현대자동차 엔지니어들은 자동차의 디자인 원리를 습득했을 뿐 아니라,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는 어떤 연필과 자를 쓰는지까지도 빠짐없이 메모해 와 훗날 자동차 개발의 참고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기술을 쌓은 결과 1991년 현대자동차는 엔진도 독자적으로 설계해 생산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현대자동차에 기술 제휴를 하던 일본의 미쓰비시 자동차 회장은 현대자동차 연구소를 방문해 개발 중인 엔진을 본 뒤 일본에 돌아가 전 직원을 모아 두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한국이 곧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그 후 현대자동차는 1994년 자동차의 핵심 기술인 자동차의 뼈대, 즉 섀시 개발까지 성공했고, 1995년에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 됐습니다. 지금도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술 도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래는 친환경 자동차가 대세가 될 것입니다. 현대자동차는 2013년 세계 최초로 수소연료전지 자동차 양산에 성공했고 수소트럭·수소버스를 내놓으며 자동차 운송 시스템에 큰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불과 65년 전만 해도 폐차된 엔진과 부품을 모아 ‘깡통차’를 만들던 나라였다는 점을 돌이켜 보면 정말 눈부신 발전입니다.
3) 조선업의 발전
조선 산업은 한국 기업들의 도전정신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여서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조선업은 발전하지 못해 해방 직후 만들던 배는 고기잡이 목선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일제 때 세워진 대한조선공사가 있었으나 해방 후 일본인 기술자들이 떠나자 배를 만들지 못해 남은 고철로 난로를 만들어 직원들이 생계를 연명했을 정도입니다. 나중에 남태평양과 같은 먼바다에 나가 참치잡이를 하는 철선(철로 만든 배)을 만들기도 했지만 큰 배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서 만드는 ‘도크’가 없는 상태에서 본격적인 조선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출과 수입이 늘어나면서 상선과 유조선의 필요성이 높아졌고, 국제적으로도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조선 산업은 유망한 분야가 됐습니다. 일본에 조선업 기술 제휴와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퇴짜를 맞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이 조선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경제사에 길이 남을 창의적인 기업가정신으로 수없이 많은 좌절과 어려움을 이겨 내고 한국 조선업을 세계 정상에 우뚝 세우는 데 성공합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한국의 조선 산업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지자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현대에 이어 삼성, 대우 등도 조선업에 뛰어들어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끼리 품질, 가격 경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2003년, 한국은 기술 이전을 거부하던 일본을 제치고 조선업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현재 전 세계의 바다에 떠다니는 대형 선박의 50% 이상은 한국에서 만든 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유조선과 같이 액체를 나르는 탱커의 52%, 컨테이너선의 56%, 고난이도 기술이 필요한 LNG선의 68%가 한국산 선박입니다. 최근 중국 업체들이 한국의 조선 산업을 따라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얼음을 깨면서 운항하는 쇄빙 LNG선, 컨테이너 2만1,400개를 싣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LNG를 연료로 쓰는 LNG 추진선, 바다에서 석유를 채굴하는 드릴십 등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고부가가치 선박은 여전히 한국 조선사들이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카타르 정부가 한국에 LNG선을 한꺼번에 100척 넘게 주문하면서 한국 조선업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에피소드 1]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로 마케팅
정주영 회장이 조선업에 뛰어들어 2003년부터 세계 1위를 차지하기까지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는 세계 경제사에 남을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기업가정신을 보여 줍니다. 정주영 회장은 배를 만들 도크도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조선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조선소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방에 조선소가 세워질 예정인 울산 미포만 사진 한 장과 5만 분의 1 축적의 지도 한 장을 들고 해외 투자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일본에서 퇴짜를 맞은 정주영 회장은 해양 강국이었던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업계획서를 보여주며 여기에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으나 영국에서도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정주영 회장은 지갑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냈습니다. 당시에는 500원짜리가 동전이 아니라 지폐였고,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미 1500년대에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1800년대부터 철선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뒤처져 있지만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던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좌충우돌 패기에 감동한 영국 선박 컨설팅 회사 회장은 정주영 회장에게 추천서를 써줬고, 영국 수출입은행으로부터 조선소 설립 자금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출입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조건이 사전에 대형선박 수주 계약을 따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그리스의 선주에게 만약 실패하면 받은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물어 주기로 하고 유조선 2척의 계약을 따냈고 영국으로부터 차관을 받아 조선소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그런데 선주가 정주영 회장에게 준 시간은 2년 6개월이었습니다. 조선소를 짓는 데만도 3년이 걸리는 작업이었는데, 2년 6개월 안에 조선소를 짓고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배도 동시에 만들어야 했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정주영 회장과 현대건설 엔지니어들은 한편에서는 조선소와 도크를 짓고 다른 한편에서는 배를 건조하는 방식으로 26만 톤짜리 유조선 두 척을 기일 내에 완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정주영 회장의 도전을 말렸습니다. 조선소도 없고 한 번도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20만 톤이 넘는 대형 배를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잘못해서 돈을 물어 주게 되면 현대건설은 부도가 나고 맙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만류할 때마다 정주영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 봤어? 해 보고 얘기해!” 정주영 회장의 최종 학력은 강원도 통천에서 소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려운 시절 먹고살기 위해 부두에서 막노동도 하고 쌀 배달도 하고 중고차 수리도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를 자동차와 조선의 강자로 일으켜 세운 것은 높은 학력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아니었습니다. 각오를 다지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해 보자는 정주영
4) 전자 산업과 반도체 산업의 발전
자동차, 조선업과 함께 한국이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분야 중 하나가 전자 산업입니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는 뉴스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반도체를 만들고 있을 때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핵심 부품을 들여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조립하는 데 그쳤습니다. 정부는 국내 전자 산업을 키우기 위해 외국산 라디오 판매를 금지하고 밀수를 엄격하게 단속하는 한편,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1961년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TV 조립도 시작했지만 이 역시 기술력이 부족해 일본에서 기술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국산 라디오를 만들었던 금성(지금의 LG)이 TV를 생산했고, 삼성도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TV 사업을 통해 전자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선진국에서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자 임금이 낮은 아시아에 생산기지를 찾아 나섰고, 임금이 낮고 솜씨가 좋은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반도체를 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술은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했고, 단순 조립에 불과해 반도체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가 고급 기술인력을 양성하고 비핵심 부문부터 국산화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전자 산업의 기술 독립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1980년대 중반 ‘3저 효과’로 수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 국내 전자업계는 독자적인 연구개발(R&D)에 집중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기술력으로 미국,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고, 2004년 이후에는 역전에 성공합니다. 이제 기술 격차까지 벌려서 최신 기술 제품인 OLED TV에 들어가는 디스플레이는 일본 기업들도 거의 대부분 한국산을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때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의 소니, 미국의 GE와 같은 기업들이 생산한 전자제품이 부의 상징이자 부러움의 대상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들 기업은 우리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매장의 가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제품은 소니 제품이 아니라 삼성과 LG의 제품입니다. 1959년 진공관 라디오를 처음 조립해 만들던 때로부터 불과 60년 만에 벌어진 기적 같은 일입니다. 1980년대 후반 전자 산업의 발전 과정에서 국내 3대 재벌이었던 삼성, 현대, LG 그룹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경쟁을 시작합니다. 컴퓨터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D램’은 1K(킬로바이트) D램을 시작으로 64K D램까지 개발돼 있었습니다.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는 1K D램부터 개발하는 단계를 생략하고 곧바로 64K D램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모두들 한국이 단계를 건너뛰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고, 성공해도 최소 3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한국은 불과 6개월 만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이 개발한 기술이기 때문에 특허 소송을 당해 막대한 특허 사용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깨달았습니다. “첨단 기술은 아무리 뒤에서 쫓아가 봐야 소용이 없다. 무조건 앞서 나가야 한다.” 국내 반도체업계는 반도체연구조합을 결성하고 서울대반도체공동연구소,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등 공공부문과 협업해 1988년 독자적인 기술로 4M(메가) D램 개발에 성공합니다. 핵심기술은 정부와 민간이 공동 연구하되 그 기술을 상용화하는 것은 민간 기업들의 경쟁에 맡기는 형태였습니다. 이 역시 시장의 창의적 기능과 경쟁력을 중요시한 형태의 민관 합작 연구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해외에 흩어져 있던 우수 인력들을 영입해 왔고, 연구개발에 아낌없이 투자한 끝에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데이터 저장 장치인 낸드형 플래시메모리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D램 분야의 강자는 일본이었는데 한국이 일본을 추월한 것입니다. 여세를 몰아 256M D램 생산에 성공한 삼성전자는 1993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고, 오늘날까지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2] 반도체 시장의 역전 스토리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 강국으로 올라선 데는 미국의 일본경제에 대한 경계심이 작용했던 측면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 제품이 미국 시장을 휩쓸고 한국 업체들도 미국 수출물량을 늘리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슈퍼 301’조라는 통상법을 내세워 일본이나 한국 수출상품에 보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전자제품과 반도체가 무역 보복의 대상이
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92년 5월 미국 반도체 업계가 미국 상무부와 무역위원회에 “일본과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가격 덤핑을 하고 있다.”고 제소했습니다. 조사에 나선 미 상무부는 한국산 반도체에 대해 최대 87%의 덤핑 관세율을 ‘예비판정’했습니다. 실제로 판정을 내리기 전에 이렇게 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비판정 관세율이 그대로 적용되면 한국 반도체 업체는 피기도 전에 그대로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은 오랫동안 반도체를 생산해 왔던 만큼 다소 여력이 있었지만 한국은 엄청난 투자비를 들여 이제야 겨우 수출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반덤핑 예비판정에 대해 일본은 “자체적인 생산 감축”으로 미국의 공격을 피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여유가 없었던 한국은 “반도체의 최대 수요자는 미국 전자업체다. 만약 한국 반도체 산업이 다 죽는다면 일본의 독점을 불러와 결국 미국 전자업체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미국 가전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다.”는 논리를 세워 미국 정부 설득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논리가 일본을 경계하고 있던 미국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결국 한국 반도체에 대한 최종 판정결과는 3.2%의 극히 낮은 덤핑 관세율이 부과되는 데 그쳤습니다. 이 판정 이후 세계 반도체는 순식간에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한국이 기술로도
일본을 앞섰을 뿐만 아니라 물량 조절에 들어간 일본과 달리 아무 물량 제한 없이 마음껏 미국 시장에 수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5) 새마을운동과 산림 녹화
1960~1970년대 산업이 발전하고 수출이 늘면서 공업 분야는 눈부시게 성장해 나갔지만 상대적으로 공장이 밀집한 도시와 농촌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초중등 교육을 받은 자식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는 ‘이촌향도’ 현상이 나타나면서 농촌은 점점 쇠락해 갔습니다.
정부는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1970년대부터 농촌 균형 발전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첫 번째는 식량 증산 및 쌀 가격 보장 정책입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전쟁 후 신생아가 급격히 늘어나는 현상인 베이비부머 시대가 시작되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쌀이 부족하게 됐습니다. 정부는 쌀 종자 개량을 통해 쌀 생산량을 늘리기로 했습니다. 수확량이 많은 동남아시아에서 기르는 품종의 벼와 전통적인 동아시아 벼를 교배해 우리 기후에 맞으면서도 쌀 수확량이 많은 품종인 ‘통일벼’를 개발해 농가에 보급했습니다. 농민들에게 비싼 가격에 쌀을 사들여 도시에 싸게 파는 ‘이중곡가제’도 실시했습니다. 농민들에게는 소득을 보장해 주고, 도시민들에게는 보다 저렴하게 쌀을 사 먹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농촌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인 ‘새마을운동’도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농촌에는 초가지붕을 얹은 집들이 많았는데, 지붕 개량 사업을 통해 매년 지붕을 갈아줘야 하는 불편을 덜었습니다. 마을길도 대부분 흙길이고 좁아서 막 보급되기 시작한 농기계나 자동차가 다니기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앞의 개울에 다리를 만들고 흙길을 넓혀 시멘트로 포장해 농기계와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구불구불하게 얽혀있는 농지도 반듯하게 만드는 경지정리를 하여 기계농업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상수도와 하수도도 새로 깔아 위생 수준을 높였습니다. 아침마다 마을회관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는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땀을 흘리며 마을 구석구석을 정비했습니다.
한국과 북한의 자연풍경을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가 바로 북한의 산은 나무들이 없는 민둥산이 많은 반면, 한국의 산은 많은 나무들로 인해 푸른 숲과 녹음으로 우거져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의 산도 헐벗은 민둥산이었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베 겨울에 불을 때고 밥을 짓곤 했는데, 인구가 크게 늘면서 산에 나무가 남아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땔감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여름 장마철에는 민둥산으로 인한 피해가 컸습니다. 흙을 쥐고 있어야 할 나무뿌리가 없으니 비만 오면 산사태가 나거나 흙이 빗물에 씻겨 내려와 논과 밭을 망치거나 강바닥에 쌓여 홍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됐습니다. 서울 등 도시는 여름마다 침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산을 나무들로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산과 물을 다스리는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위해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시기에 실시된 것이 산림 녹화사업 입니다.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경찰행정을 관할하는 내무부 산하로 산림청을 옮겨 산림훼손과 무분별한 나무 베기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산불이 나면 그 지역의 군수를 해고할 정도로 엄격하게 산림을 관리했습니다. 대대적으로 산에 나무를 심는 사업을 벌였는데, 나무를 심을 때도 아무 나무나 심지 않고 척박한 땅에서도 빠르게 잘 자라는 나무를 선정해 계획적으로 심었습니다. 나무를 심은 뒤에는 다른 지역의 공무원이 와서 나무 생육상태 등을 검사하는 ‘교차 검목’ 제도를 만들어 공정하고 효과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산림 녹화 사업은 점점 성과를 내기 시작했는데,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시기에 실시돼 효과가 극대화됐습니다. 산에 심을 나무는 그 산이 있는 마을 육묘장에서 주민들이 기르게 해 정부가 사주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산림 녹화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과 열정을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산의 나무를 베어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 화전민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도시로 이주시키고 이들이 다시 산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장기간 관리했습니다. 농지개혁 때 그랬던 것처럼 법으로 강제하는 것과 동시에 경제적 유인책을 제공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택 개량 사업이 산들이 다시 푸르러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리 나무를 많이 심어도 겨울에 불을 때거나 밥을 짓기 위해 나무를 다시 베가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각 가정의 난방 시설을 연탄보일러로 개조하고, 석유곤로도 많이 보급했습니다. 국민들이 나무를 벨 일이 없게 근본적인 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장기적인 산림 녹화 사업의 결과 오늘날 한국의 산하는 푸른 녹음으로 가득 차 있고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예전만큼 홍수피해를 입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성공적인 산림 녹화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사례로 손꼽히고 있으며, 많은 국가들이 배우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6) 실패로 돌아간 북한의 경제개발 계획
한편 한국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던 이 기간 동안 북한의 경제개발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남북한은 해방 이후 몇 차례의 갈림길을 거치면서 경제 발전의 정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48년 남북이 따로 정부를 수립하던 시기, 남한은 자본주의를 택하고 북한은 공산주의를 택한 게 첫 번째 갈림길이었고 두 번째 갈림길은 경제개발 전략이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해방 직후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유리한 공업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만든
대부분의 공장이 북한에 있었고 일본 기술자들을 잔류시켜 공장 가동의 기술을 전수받는 등 남한보다 먼저 ‘중공업 우선’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앞선 1957년에 ‘5개년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고 ‘천리마 운동’ 등 대중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복구 사업과 공장 건설에 나섰습니다. 초반에는 이런 정책들이 어느 정도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름대로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5개년 계획’을 조기에 달성했다면 서 1961년부터는 ‘인민 경제 발전 7개년 계획’에도 착수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3~4년 후에는 북한 인민의 물질적, 문화적 생활에 일대변화가 일어나 모두가 기와집에서 살고 흰쌀밥과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부유한 생활이 될 것”이라고 선전했으나 정작 중국과 소련이 북한에 대한 자금지원을 꺼리면서 자력에 의한 경제개발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공업개발에 필요한 본격적인 대규모 자본과 핵심기술을 이전받지 못하게
되자 경제개발 계획이 구호에 그치고 만 것입니다. 북한 경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고립되고 후진적인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계획기간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계획을 다시 세우는가 하면, 발표하는 통계도 신뢰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북한의 경제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됩니다. 첫째, 계획경제의 한계입니다. 남한에서도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이 이뤄졌지만, 정부는 이끌고 밀어줄 뿐 경제 활동의 주체는 기업과 국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중앙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했기 때문에 정부가 판단 착오를 하면 피해가 크고 돌이키기 어려웠습니다. 남한도 산업화 과정에서 여러 위기를 맞이 했지만, 도전적인 기업들이 해외에서 시장을 개척하면서 돌파해 왔습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는 누구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집단의 실패가 전체의 위기로 번지지 않았습니다. 둘째, 지나친 중공업화 정책의 부작용입니다. 북한은 중공업화 정책, 특히 군사 분야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했습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지만, 군사비에 지나치게 지출을 많이 해서 산업 간의 불균형을 초래했고, 주민들은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남한도 한때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가 문제가 됐지만, 중화학공업이 군사용이 아닌 수출을 위한 전략 산업이었기에 구조조정을 통해 빠르게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자립경제 노선이 스스로의 고립을 불렀습니다. 북한은 ‘자력갱생’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지역별로 자립 경제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규모의 경제 실현에 방해가 되고 중복 투자를 불러왔습니다. 또한 자급자족 경제가 되려면 자원이 풍부하고 충분한 내수 시장이 확보돼야 하는데, 북한은 자원도 부족하고 내수 시장이 크지 않았습니다. 자력갱생이라는 구호만 외치다 1990년대 초 공산권이 붕괴하자 바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당시 개혁·개방을 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빠르게 경제를 회복한 데 반해 북한은 고립 노선을 택하면서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와 달리 남한은 철저한 수출 주도 공업화 정책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자원을 사와 가공해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면 돈을 벌 수 있었고, 이렇게 번 돈을 다시 투자해 더 좋은 상품을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해외 시장에서 선진국 기업들과 생존을 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어느덧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습니다. 이밖에 독재 체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는 점 등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1975년까지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750달러)이 남한(574달러)보다 높았으나, 1976년부터 역전된 것으로 추정됐고, 1980년대에는 서방세계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파산 국가’로 지정됐습니다. 여기에 1990년대 초 소련을 비롯한 유럽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북한 경제가 더 큰 충격을 받게 됐습니다. 석유가 나지 않는 북한도 대부분의 자원을 외국에 의존해야 하는데, 우방이었던 공산권마저 붕괴되니 원자재를 수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됐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0년대 중반에는 대기근이 닥쳐 배급이 중단되는 등 심각한 식량난까지 겪게 됐습니다. 이 시기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경제성장의 그늘이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중화학공업의 약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중화학공업 업종으로 선정된 일부 기업들이 정부의 온갖 혜택을 받게 되면서 오늘날의 ‘재벌 기업’으로 커져 시장을 독점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기업들이 계속 빚을 내서 사업을 키우는 확장경영의 부
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은행이 사실상 정부관리에 들어가 수출 기업에 정책자금을 장기적으로 공급하다 보니 ‘관치금융’ 폐해도 나타났고, 고도성장을 강조하다 보니 분배가 악화되고 근로자들의 삶과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시기도 길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침몰한 북한경제와 달리 한국경제는 여러 문제점을 극복해 나가면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지속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세계인들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한국을 선정한 것은 한국경제의 한계를 수출로 돌파하고자 했던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정책 수립과 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개척했던 민간 기업들,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 교육을 통한 우수한 인적자원이 합쳐진 결과였습니다.
[출처 : KDI, 한국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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